김샨은 여자의 얼굴을 그렸다. 그 얼굴은 현실적 인간의 모습인 동시에 그로부터 무척 벗어나있다. 다분히 비현실감이 감도는 얼굴이다. 만화이미지나 그래픽적인 느낌이 강하게 묻어난다. 그와 동시에 종교적인 도상의 내음도 풍긴다. 이집트의 조상 혹은 바티칸의 이콘을 떠올려준다. 도식적인 얼굴생김새와 초현실적 색채, 명확한 윤곽선으로 그려진 눈과 눈동자, 간추려낸 윤곽선 그리고 신체가 과감히 생략되고 전적으로 얼굴에만 맺혀진 강조점이 그렇다. 그것은 우울해보이고 적조하며 명상적이기도 하다. 우아미와 슬픈 정조가 한 몸으로 흐르는 성상 聖像이나 생사를 초탈한 표정으로 마감된 부동의 이집트 조상 彫像 등도 오버랩된다. 그런가하면 얼굴과 몸들은 화사하고 밝고 눈부신, 몽롱한 색채의 파동 속에서 부유한다. 떠다니고 흘러가는 듯한 그 인간의 몸들은 더없이 아름답고 아늑하고 더러 감미롭다. 얼굴의 세부적인 부분들은 생략된 편이다. 과장된 큰 눈과 눈동자, 눈동자는 원형으로 선회하듯 색 층으로 그려져 있고 입술은 다물어져 있다. 몸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자리 잡은 얼굴과 간혹 등장하는 손은 적막한 화면에 말을 건네는, 이야기를 자아내는, 작가의 의도와 심리를 추측케 하는 단서 같다. 그것은 마치 일정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 보인다. 이 얼굴은 작가의 초상이나 타인의 얼굴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상상해서 그려낸 얼굴이지만 결국은 작가 자신의 얼굴과 마음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아 보인다.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 저당 잡힌 듯한 인물, 인물들은 작가 자신의 추억과 기억 속에 강력하게 자리한 대상, 공간일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추억과 관련되어 있어 보인다.

얼굴만을 그린다는 것은 일종의 자기 치유적인 심리가 내재해 있다고 상상해볼 수 있다. 어린 아이들은 틈만 나면 사람의 얼굴을 도화지 가득 그린다. 특히 여자아이들은 인형이나 긴 드레스를 받쳐 입고 길게 땋은 머리를 지닌 공주이미지 혹은 이상적인, 동경의 대상들을 공들여 재현한다. 그 그림에는 자신이 소망하는 대상에의 투사와 어머니에 대한 결핍과 그리움, 어른이 되고 싶다는 욕망 등이 촘촘히 스며들어있다. 나로서는 이 작가의 그림에 그런 흔적이 상흔처럼 남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 속 얼굴은 배경으로부터 독립해서 돌출되어 보인다. 확고하게 밀고 올라오는 얼굴은 화면에서 분리되어 떠돈다. 유동적인 붓터치와 몽환적인 색채는 그런 상황성을 증폭시킨다.

오일을 엷게, 여러 번 발라 올리면서 밝고 투명한 색조를 유지하는데 이 색상은 작가에 의하면 어린 시절 이집트 카이로에서 보낸 추억과 관련이 깊다고 한다. 나일강 유역의 따스한 기후, 강렬한 태양, 그 아래 번지는 화려한 색상의 아롱짐, 마치 강한 햇볕에 데워진 수영장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몽롱함과 나른함, 그로인해 항상 환하게 밝으며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 분위기 등이 이 작가의 기억과 심리 속에 원형으로 자리하고 있다. 하얗게 부서지는 태양 빛에 의해 드러난 세계의 상은 환시적 밝음의 세계였을 것이다. 그 기억과 감촉, 분위기가 부드럽고 밝은 색채로 가시화되고 그 안에서 자신과 어머니가 함께 했던 추억들이 부풀어 오르는 장면이 지금의 그림으로 재현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작가는 '젊고 예뻤던 엄마의 장밋빛 볼터지'에 대해 추억한다. 그래서인지 그림 속 여자들은 한결같이 아름다운 여인들로 그려지거나 자신의 추억 속 인물상으로 도상화되고 색채들은 복숭아빛 신선한 혈색과 맑고 투명하며 가벼운 붓터치로 마감된다. 인물은 단독으로 혹은 두 사람으로 설정되어 있다. 드물게 꽃이나 풍경이 배경으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얼굴과 몸만이 환각적인 색채를 무대로 자리한다. 인물이 속해있는 공간은 마치 뜨거운 열기에 의해 올라오는 아지랑이, 수면에 반사되어 비치는 햇살, 현실과 꿈 사이를 경계없이 오가는 듯한 장면으로 치환된다. 그것은 전적으로 색채와 색상들의 계조 아래 조율된다. 마치 오르피즘이나 고흐 그림의 소용돌이치는 듯한 터치를 연상시키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또 다른 세계를 꿈꾸게 하는 매력이 있다. 작가에 의해 상상되어진 색상은 그만큼 또 다른 세상을 연상시키고 그와 소통하고자 하는 욕망과 연결된다. 사실 인간의 얼굴은 너무 깊고 아득하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비밀, 심난한 내면, 타자에게는 절벽 같은 경험과 사유들로 가득한 모순덩어리가 인간의 얼굴이다. 그런 의미에서 얼굴은 결국 인간만의 얼굴이다. 식물과 동물의 얼굴, 벽의 얼굴도 있지만 그것은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얼굴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오로지 우리는 타인의 눈을 통해 그 안을 엿보고 싶어한다. 그래서 눈은 얼굴 안에서 핵심적 장소를 제공해준다. 작가가 강조하는 눈은 심리, 명상, 정신적 분위기, 그림을 보는 관자에게 호소하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아울러 얼굴은 무척이나 신비로운 신호 발생 장치이다. 얼굴은 놀라운 깊이와 무한한 색조를 띤 메시지를 발산한다. 눈도 마찬가지다. 김샨이 강조해 그린 눈동자의 색깔과 확장된 동공은 기묘한 낯설음을 준다. 프로이트는 "기이한 것은 현실 속에서의 전혀 새롭고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형성된 오래되고 친숙한 것이, 단지 억압과정을 통해 마음으로부터 소외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무의식의 투사에 다름 아니다"라고 말한다. 프로이트가 지적하고 있듯이, 기이함은 감추어진 것을 폭로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낯익은 것을 낯선 것으로 섬뜩하게 변형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기이한 것은 오래되고 낯익은 어떤 것이 억압되어 정신으로부터 소외되는 과정을 거쳐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이함의 효과는 전혀 낯선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안전하고 자연적인 것 뒤에 감춰진 모호하고 폐쇄된 영역의 가시화를 통해 나타난다. 이 같은 환상성은 낯익은 것을 다시 낯선 것으로, 안전한 것을 불안한 것으로,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든다.

김샨이 그린 얼굴은 영혼에 직접 말을 건네는 이콘에 유사하다. 도상적인 이 얼굴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얼굴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